'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 -『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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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사이퍼의 경우
그에 관한 철학서만 3권이 나올 정도로 영화 매트릭스를 해석하는 층위는 깊고 넓다. 나의 영화에 대한 첫 인상은 이젠 빛이 바랜 용어인 '테크노' 액션에서 비롯되었다. 뭐, 대단한 액션이 나오나 보다 했다. 키아누 리브스가 액션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고.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는 당시 한창 들여다보고 있던 라깡의 이론까지 들먹이며 그 뛰어난 은유에 감탄했었다. 형, 동생과 함께 몇 번이고 다시 보며 밤 늦도록 장면 하나, 대사 한 토막에 담긴 종교적, 철학적 알레고리를 풀어보곤 했었다. 2,3편을 보고나서는 좀 시들했지만... 아무튼, 세기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자 RATM의 'Wake Up'에 이르면 자못 전복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이야기, 매트릭스.


새삼 매트릭스를 떠올리는 것은 김규항님의 '평범한 사람'이라는 글을 읽고 그 영화 속의 인물 '사이퍼'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고 있는 사이퍼 역시 빨간 약을 먹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real world'에서 고군분투했었다. 하지만 그는 '왜 그때 내가 파란 약을 택하지 않았는지!' 후회하며 스미스 요원에게 일행을 넘겨(?)버린다. 그가 스미스 요원을 만난 장소는 고급 레스토랑(외식). 그곳에서 그는 좋은 집(아파트)과 스포츠카(차), 그리고 유명인으로서의 지위를 약속 받는다. 요컨데 다시 매트릭스로 들어가겠다는 것인데, 그런 행동은 주체적 의지를 버리고 자본주의 시스템의 단맛에 투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규항님의 말대로 '주체적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뭔지 세상이란 게 뭔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이퍼는 (김규항님의 (김규항)사전적 해석과 영화의 은유를 비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렇게 대비를 하고 나니 좀 가혹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입안의 달콤한 스테이크가 진짜 스테이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 맛을 이기지 못하고 가짜에 몸을 내맡기는 건 평범보다는 (나쁜 의미의) 비범이 아닐까. 나의 평범함을 변명하려는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평범은 스테이크와 풀죽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이런 모습.


최소한 그렇게 갈등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라야 가는 희망이라도 찾을 수도 있을테니까 말이다. '외식과 아파트와 차'로 대표되는 체제 내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사람들. 그들이 대다수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평범이라는 단어를 넘겨버린다면 어쩐지 좀 서글퍼진다. 간혹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내가 전혀 평범하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비범하여 뭔가 획기적인 일-이를테면 네오의 'Superman Thing' 같은 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평범할 뿐이며 그렇게 갈등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뭔가 큰 일을 이룰 것이라는 교과서적인-혹은 사민주의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요컨데, 평범이라는 단어에 '다수'라는 뉘앙스가 담겨있다면 나를 포함한 그들이 '완전히 지배받'고 말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한다는 소리다.


그나저나 난 왜 이렇게 평범에 매달리는 것일까?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 주는 불안감 때문은 아닐까? 불안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일종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행동이라면, 그것도 넘어야할 산이다.
by 허용 | 2005/02/18 19:14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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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눈이오네요 at 2005/02/19 08:52
허용님 글에 공감합니다.
김규항씨는 사회주의자니까 다수의 힘을 믿을 거고
그걸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군요.
다수의 힘을 믿기에 다수를 비판한달까..^^
Commented by 허용 at 2005/02/19 11:00
제 글의 요지를 잘못 이해하신 듯 합니다만... 음... 그러니까 <평범이라는 단어에 '다수'라는 뉘앙스가 담겨있다면 나를 포함한 그들이 '완전히 지배받'고 말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한다는 소리>입니다.그리고 저 역시 억압받는 다수의 힘을 믿습니다. 그걸 사회주의적이라고 하신다면, 저도 사회주의자이겠네요.
Commented by 눈이오네요 at 2005/02/19 11:31
제말이 바로 그말인데, 표현이 부적절했던 것 같군요...쩝
Commented by 허용 at 2005/02/19 11:58
엇, 죄송^^;;;
Commented by 지성의 전당 at 2019/01/25 18:35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매트릭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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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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