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 -『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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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의 [세시잡영(歲時雜詠)]
'세시풍속'을 주제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개관이 얼마 남지 않아 바쁘기가 그지없다. 전시에 쓰일 조선시대의 세시기(歲時記)들을 찾아 읽고 있는데, 와중에 이덕무의 '세시잡영'이라는 시를 접했다. 늦은 밤 사무실에서 그의 시를 읽다가, '역시, 이덕무야!' 했다. 다른 세시기들은 기록적인 성격이나 목적이 강해서 일년의 세시풍속을 상세하게 풀어 적거나, 시로 읊어도 각 편마다 제목을 붙여 정리하는 식이다. 전시에 필요한 정보나 글을 얻기에는 그런 류의 글들이 유용하지만, 뭐랄까 여운이나 느낌은 없다. 반면에 이덕무의 시는 그저 여항의 풍속을 기록하지만 않고 거기에 자신의 심회를 슬슬 녹여내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은 그런 풍속과는 무관하다는 듯 한발짝 비껴선 가짜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다. 시의 첫 두수는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시는 모두 22수의 5언 절구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 번역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조선대세시기] 2권을 따랐다. 원문은 생략한다. 그럴 여유까지는 사실, 없다.)



가친의 편지가 남쪽에서 이르러 / 새해를 상서롭게 맞으라 하시네 
소자 절하고 답장을 올리오니 / 삼가 장수하시고 복 많이 받으시옵소서.


세상 사람 따라서 길한 말로 / 만나는 사람에게 웃으며 축원하네 
소자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 어머니의 폐병이 나으시는 것이네


새해를 맞는 세상의 풍경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지은 시지만 똑같은 성격의 시들과 달리 부모님과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먼곳에 계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를 걱정하는 모습이, 뭔가.. 짠하다. 사실 이덕무는 서얼 출신으로 출세하고 성공하는 데에는 선천적인 제약이 있었다. 서울에서 관직을 지냈다지만, 그리고 국왕(정조)의 직속 기구(규장각)에서 근무했다지만 전혀 부유하지 못했다. 추운 겨울날 장작 살 돈이 없어 읽던 책을 겹겹이 이불로 삼고 병풍으로 삼아 지냈던 그였다. 그렇게 자신도 편하지 못한 신세에 부모님을 걱정하는 모습은 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더하다.



친정에 가 있는 병약한 아내는 / 새해 맞아 남몰래 눈물 흘리리
슬프도다 땅 속에 묻힌 딸년은 / 살아 있으면 이제 네 살일텐데



아~ 이 양반, 참.. 궁상이시다. 그런데, 절절하다. 병든 아내와 죽은 딸.. 새해를 맞이 했는데 이렇게 슬픈 생각만 하실 요량인지.. 그래도 설날이니 집을 나서 근처의 친척 어른들에게 세배를 나선다. 나선 길에 친구들의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구절이다.



삿갓 꺼내 수북히 쌓인 먼지 떨고는 / 푸른 도포 차려 입고 세배하러 나가네
삼호에는 이모님 댁이 있고 / 동문에는 큰 어머님이 계시네


여범은 부인 장례를 치르고 / 섣달그믐에 졸곡 제사 지냈네
옛 사람 그리워 어떻게 견딜까 / 새해를 맞이해 더욱 무료하겠지



별일도 아닌 것에 바빠하거나 소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부르지 않은 곳을 찾아가 기웃거리며 이익을 얻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 잃은 친구의 슬픔에는 깊이 공감한다. 이렇게 쓸쓸한 양반이라도 낡은 삿갓과 푸른 도포를 입은 청장관의 모습은 왠지 '간지'가 있었을 것 같다. 딸들이 널뛰기를 하며 노는 모습을 보는 그의 그윽한 미소도 떠오른다.



두 딸은 마치 오리처럼 가볍게 / 널 끝에서 오르락 내리락
모습은 하늘하늘 패옥 소리는 쟁쟁 / 번갈아 누각 높이 솟아오르네



옛날에 널뛰기를 할 때 여성들은 노리개를 차고 했단다. 그러면 오르락 내리락 하며 노리개의 호박이며 구슬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 주변의 사람들과 모습만 쓸쓸히 노래했다면 이덕무가 아니었을 것이다.



관가에서 내린 금주령이 두려워 / 도소주조차 담그지 못하네
백성들이여 그대들이 어찌 알리 / 큰 항아리에 청주가 넘치는 줄을


상등 부자는 소 두어 마리 잡고 / 중간 부자는 소 한 마리는 잡네
지난해 역병에 소가 죽었으니 / 봄 농사를 어찌 걱정하지 않으랴



도소주는 설날 아침에 세찬과 함께 마시는 찬술인데. 이 술을 마시면 한 해 동안의 사사로운 기운을 없애고 오래 살 수 있다고 한다. 돈 없고 능력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소박하게 술 한 잔으로 벽사(辟邪)하고 기복(祈福)하였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벽사와 기복'이다.) 그런데 나라에서는 금주령을 내렸다. 그걸로 부당하게 돈 버는 사람들 때문이다. 애매한 사람들만 설 분위기도 못 내고 있지만 사실, 가진 자들은 큰 항아리에 술을 가득 담아 놓고 즐긴다. 부자들은 소까지 잡아 즐기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잡아 먹을 소는 커녕 있는 소마저 병으로 죽어 당장 봄 농사를 걱정해야 한다. 즐거운 설인가? 이덕무 같은 이들이 명절에도 쓸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성난 눈으로 비분강개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모름지기 해가 바뀌는 시절이라면 스스로를 돌아볼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한평생 마음이 거칠고 게을러 / 섣달그믐만 되면 늘 슬퍼지네
섣달그믐 마음가짐 언제나 간직하고 / 다가오는 새해에는 사람 노릇 잘 해야지


갑신년이 조수처럼 물러가니 / 거세게 흐르는 세월 잡아 둘 수 없네
장사도 이것은 어쩔 수 없어 / 하얀 귀밑머리 짧아지려 하네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 속에서도 세상에 대한 날선 눈매를 잃지 않는 모습. 그리고 방대한 독서로 얻은 지식과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성심을 다하며 바른 세상을 경영하고자 했던 삶.. 본받고 싶다. 시를 읽으며 푸훗 웃음이 새어 나오는 구절도 있었는데, 마치 세상을 다 산 듯 쓸쓸한 생각을 하고 세월을 아쉬워 하고 있지만 그가 이 시를 지었을 때는...




사람들은 나이가 쉰 살이 되면 / 말끝마다 반백이라고 탄식하네
내 나이 이제 스물 다섯이니 / 바로 쉰 살의 절반이 되었네


새해와 묵은 해가 나뉠 즈음 / 대청의 등잔 불꽃 어느덧 낮아졌네
나에게 길고 긴 새끼줄이 있다면 / 첫새벽 우는 닭을 묶어 두고 싶네



고작 스물 다섯..! 하긴 스물 다섯이라고 이런 노래를 부르지 말란 법은 없다. 나 역시 성능 좋은 새끼줄이라도 있다면 새해를 알리는 닭들의 목을 죄다 묶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니...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있다.

by 허용 | 2009/11/19 23:24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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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보노보노T at 2009/11/20 00:30
멋진 글일세!
Commented by 허용 at 2009/11/20 20:32
감솨~
Commented by 전범수 at 2009/11/20 02:10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성능 좋은" 상상력과 감수성이 잘 작동하고 있는 걸 보니, 괜히 애먼 닭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필요는 없겠다. 준비 잘 해라. 기대된다. 나도 이 해가 가기 전까지는 Morris에 대한 내 답글을 올릴 작정이다!
Commented by 허용 at 2009/11/20 20:37
'애먼' ... 이 단어가 생각나질 않아서 한참을 뒤적거리다 결국 '애매한'이라고 썼는데!! 모리스는.. 나도 그 책 이후로 더 진도를 못나가고 있다. '느리고 방만하게' 하자 했으니.. 계절 바뀌니 건강 잘 챙겨라. 타향에서 혼자 지내는 남정네들, 건강하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더라..
Commented by santiago덕현 at 2009/11/23 02:44
전 올해 24, 내년에 시 한수 짓겠습니다
Commented by 허용 at 2009/11/23 15:40
다가오는 설에 귀국하면 기념으로다가 광화문에서 '도소주' 한 잔 하자. 그때 시 한 수 읊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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