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而不思卽罔 思而不學卽殆' -『論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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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첫 직장이 광화문 한복판에 있었다는 걸 나는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무서운 도로와 찌들은 골목들만이 끔찍한 핏줄처럼 뻗어 있을 뿐이라고 여겼던 서울을 다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수백년의 세월을 안은 채 꿋꿋히 자리를 지켜온 고궁과 도심의 소음을 깜쪽같이 차단해 버리는 그곳의 나무들, 오래된 밥집과 술집들, 오래된 동네와 그 사이 숨어있는 작은 공원들.. 그런 오래되고 한적한 것/곳들을 품고있는 광화문을 '재'발견하면서 나는 서울에 대한 나름의 애정을 키울 수 있었다. 광화문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그런 오래된 것들 주위로 커다란 서점과 말끔한 까페,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좋은 영화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광화문과 가까운 곳에 거처를 두고 있는 것도 조금만 움직이면 그런 좋은 것들을 맘껏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8월 31일 광화문 씨네큐브가 문을 닫았다. 덕분에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시설도 환경도 좋아 꼭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잠깐씩 들르곤 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상영한 영화-This is England-는 2년 전부터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영화였더랬다. 씨네큐브 같은 곳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영화였다. 영화관을 운영하던 백두대간이 아예 문을 닫는 건 아니니 절망스러운 일까지는 아니지만, 이제 광화문을 찾을 이유가 또 하나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광장이란 모름지기 그런 공간이 아닌데, 시청 앞에 광장이란게 생기면서부터 광화문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얼마전 생긴 '광화문광장'이라는 걸 보고는 어렵게 들었던 정마저 떨어지는 것 같아 화가 났다. 피맛골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오래된 술집과 밥집들도 이제 모두 허물어져 버렸다. 재개발이라는 괴물에 쫒겨 엄청나게 큰 주상복합건물 속으로 구겨져 들어갔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정취와 역사(!)를 지닌 작은 가게들이 이제는 그저 돈 받고 밥 팔고 술파는 곳으로 전락해 느낌이다. 아무리 간판에 since 어쩌고 저쩌고를 적어놓아도 몇십층 건물 속에 자리잡은 가게들에서 그런 세월을 느끼기는 힘들다. 가짜 광장과 재개발은 그렇게 광화문에 대한 나의 기억과 감각들까지 지워버리고 있다. 언제쯤 이 잔인한 폭주가 멈출까?
by 허용 | 2009/09/02 00:21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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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김유경 at 2009/09/02 09:40
`씨네큐브'는 동숭동 하이퍼텍나다(구 동숭시네마텍)에 이어 두 번째로 마음놓고-주변의 소음이나 영화를 왜 보러왔나 싶을 정도로 무례한 행태를 걱정하지 않고-영화보기에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혼자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숨어있기 좋은 공간이기도 했고, 자막이 다 올라간 다음에야 느릿느릿하게 열리는 옆 창문 커튼이 고마운 공간이었지.
내게도 이제 광화문에 정을 붙일 곳은 교보문고 하나뿐 인듯하다.
Commented by 허용 at 2009/09/02 14:04
맞아, '숨어있기 좋은 공간'이었지. 영화 보기도 좋았고. 좌석이 편해서 그랬는지 난 그곳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다가 졸기도 했다는.. 이대 모모에서 활동을 계속한다지만, 거리가 그리 멀지도 않지만, 아무래도 자주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말이야, 영화만 재미있게 보면 된다 생각하나 본데, 촌스러운 나는 아직도 극장을 가는 게 간단한 외출 이상의.. 뭐랄까 '의례' 같은 건데 말이지.. 교보에 들르는 것도 그렇고.. 이제 가을이다! 조만간 광화문에서 보자. 좋은 가을 선물도 기대하시고..^^
Commented by 김유경 at 2009/09/02 14:29
나도 가을임을 인정! 더워서 엄두 못내던 자전거를 이번주부터 다시 타고 격일로 출퇴근하는데, 너무 상쾌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연락해. 친구.
Commented by 전범수 at 2009/09/02 16:26
좋겠다! 서울에 가을이 이미 왔다는 걸 보니 며칠후면 텍사스에도 도착하겠군. 교보, 광화문, 동숭동, 선물, 가을 바람과 커피향, 기다림, 친구... 오늘 또 새로운 학기를 시작한 이 몸, 도저히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기가 어렵구먼. 이거 너무들 한 거 아냐? 거 참..원...험...에이...이런...뭡니까!
Commented by 허용 at 2009/09/02 21:42
쫌 미안하려다가도 웃기고 그렇네!! 음... 그러니까... 범수야... 니가... 텍사스에서... 공부하고... 그러면서... 있는 게 죄다!!! ㅇㅎㅎ 그곳에서 상큼한 가을을 보내길 우리가 기도해 줄게!!!
Commented at 2009/09/05 13: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허용 at 2009/09/09 21:40
아! 이곳에서 다시 보니 반갑고 또 쫌 어색하고 그렇네요. 공부는, 생활은 어떠신지. 유경에게 들은 이야기에 제 상상을 약간 덧붙이면, '호기심과 발랄함으로 무장한 외로운 유학생'으로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예전에 만났을 때 인상적이었던 눈빛과 웃음 때문은 아닐지.. 건강하시고, 한국(서울)에 돌아올 때는 무지막지하게 변해버릴 거리와 환경들에 놀라지 않도록 준비 단단히 하시길.
Commented by 강2 at 2009/09/24 00:42
안그래도 곧 한국에 들어가요. 막내가 결혼을 하거든요. 사실 가난한 유학생이라는 명분하에 한국에 '못간다!'는 씨알도 안먹힐 궁리를 했던건, 바로 그 변해버린 서울을 볼 충격을 피해보고자... 그랬던 것인데. 공부는 즐거웁고, 생활은 아직도 적응 중인거 같아요. 그나저나, 인상적(!)이었던 눈빛과 웃음이란 말에 웃음이 빵 터졌어요. 덕분에 웃었습니다 :) 오빠도 건강하세요! Cheers!
Commented by 허용 at 2009/09/28 15:30
그래도 사람 사는 속내는 크게 변하지 않았을 테니, 더구나 그대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니 크게 걱정은 마시길. 그나저나, 막내도 장가가는데.. 바로 손윗누님은 어떡하시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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