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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1월도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작천에는 벌써 눈이 쌓였단다. 불현듯 찾아온 겨울처럼 내 나이를, 나는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 여전히 27살만 같다. 군대를 제대하고 미술사를 막 공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일기를 쓰거나 지난 일을 회상할 때면 늘상 ‘어느덧’이라는 단어가 앞설 뿐이었다. 27살 이후로 시간은 그렇게 인정하기 싫을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바쁘고 열정적인 생활이기도 했고, 쌓지 못하고 소진시키기만 하는 생활이기도 했다. 혹은 여전히 나는 U2의 노래 제목처럼 아직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그 '어느덧'이라는 단어보다 ‘이제는’이라는 단어가 더 빈번히 상념의 앞머리에 나선다. 27살의 젊은 청년이 이제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슬슬 그 흐름을 탈 수 있게 된 것인지... 늦여름이 되서야 뒤늦게 파도타기에 성공한 그 여학생-[초속 5센티미터]의 두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처럼 말이다. '어느덧' 10년여의 시간 흘렀으니 '이제는' 그럴만도 하다.
이제는 애쓰며 살고 싶지 않다. 이제는 뭔지 모를 그것을 찾고 얻기 위해 안달하고 싶지 않다. 사실 요즘 그렇게 애쓰거나 안달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면 내 몸이 종종 스스로 멈춰버리는 탓에 곤란한 때가 많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여전한 열정을 불태우지만, 어떤 일에는 예전같지 않은 냉담함 혹은 담담함을 내비치는 나를 확인할 때면 푸훗, ‘너도 많이 닳았구나..’ 웃는다. 어쩌면 이제 쌓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모르는 사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제는 애쓰지 않고 살아가는 둔한 모습 그대로 시간과 열정이 축적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행여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이제는'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지난 4일 몇달간 매진했던 전시가 개관했고, 오늘 어수선했던 수장고를 정리하면서 전시에 매달렸던 생각과 감각도 평정(?)을 되찾은 듯 하다. 가욋일 하나를 맡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학회지에 투고할 논문은 이달 안으로 완성해야 한다. 12월에는 전시도록에 싣지 못한 '여동빈'에 관한 논문을 쓸 계획이며, 계속 미뤄지는 번역작업도 기.필.코 진행시킬 것이다. 와중에, 얄님의 전시도 놓치지 않을 것이며, 작천에 내려가 장작불에 내가 캤던 고구마도 구워 먹을테다. 그리고 만약 내가 '전시'일을 계속하며 살 수 있다면 반드시 기획해 보고 싶은, 내 능력의 최대치를 짜내 만들어 보고 싶은 전시의 주제도 생겼다. 막 신나고 즐거운 과정은 아닐테지만, 오히려 아프고 힘든 과정일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해보고 싶은 주제다. 그 전시를 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전시를 통해 비로소 어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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